▲    ⓒ월간 평택문화

고향, “대한민국의 축소판” 평택이 특별한 시인
박후기(49) 시인은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가 고향이다. 글의 시작부터 웬 고향타령이냐고 타박을 할지도 모르겠다.
박후기 시인에게 고향 평택은 의미가 남다르다. 시인은 스스로 평택을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시인이 그렇게 인식하는 중심에는 ‘미군기지’가 자리하고 있다.
팽성읍 안정리 일대 미군기지, 캠프험프리스(K-6). 어릴 적부터 삶의 배경이 되었던 미군기지는 시인의 삶은 물론 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럴 것이다. 신영복 교수의 말이 정확히 박후기 시인을 꼭 찍어서 말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그 부모를 닮기보다 그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고 하였지만 내가 고향에 돌아와 맨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는 발견이었다.’

고향, 평택이 특별한 시인. 그의 작품에 고향과 미군기지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기지촌에 비는 내리고// (…) 깨진 애자의 젖은 몸이 길 위에 뒹굴고/미제 험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불에 그을린 애자의 몸을 밟고 지나가네
-「애자의 슬픔」 부분

(…) 스무 살 여린 내 눈물이/군용 소보루빵의 푸른곰팡이로 피어났고/숨죽인 초소 뒤편 (…)
-「내 가슴의 무늬」 부분

캠프험프리의/겨울밤은 깊어가고/맥심 클럽 뒷골목/툭, 툭, 툭,/언 땅 걷어차는/클럽 북소리 들린다 (…) 하얀 이불 속에 발목을 묻고/밤새 너를 기다린다, 엘리스 (…) 
-「목필연가」 부분

3월 24일 오후 4시. 서울 삼청동 정곡도서관 앞에 있는 카페 ‘커피볶는 도도’에서 박후기 시인을 만났다. 낡은 검정색 가죽점퍼를 입은 시인의 크고 깊은 눈에 우수(憂愁)가 고여 있다. 시인은 눈을 ‘우리 몸의 가장 깊은 곳’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 아주 가물어 샘이나 저수지가 마를 때, 가장 나중에까지 물이 남아 있는 곳이 그 샘과 저수지의 가장 깊은 곳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우리 몸의 가장 깊은 곳을 눈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산문집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2013) 중에서

카페 2층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내내 시인은 연신 평택을 이야기 했다. 시인으로서 고향 평택은 어떤 곳인지를 물었다.
“박후기 시의 근원, 혹은 시적 정서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분단되고 분열된, 자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이 나라의 축소판이 평택이지요. 이런 얘기하면 싫어하는 고향 친구들 많습니다. 저도 안에서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도두리에 혼자 계시던 어머님마저 몇 해 전 고향을 떠나신 후, 가끔 친구 부모님 장례식장에나 들릴 때 평택에 와 보곤 합니다. 어느덧 밖에서 평택을 보게 된 것이지요. 요즘 평택 관련 뉴스는 거의 모두 평택항, 제2함대, 미군기지, 중국 등 군사적인 사건과 관련한 것들 뿐이더라고요. 평택이 동북아 최고의 군사기지인데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피부로 잘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토박이 의식이 다른 곳보다 느슨하거니와 동서양의 조화를 오래 전부터 습득한 곳이기에 문화적인 마인드만 결부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요.
이렇든 저렇든 모든 걸 떠나 좋은 친구들이 아직도 발붙여 살고 있고, 제 유년기의 추억과 정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평택입니다. 평택이란 말만 들어도 눈이 둥그레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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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나의 현재와 미래를 망쳐버릴 수 있는 중요한 문제
시인은 고향 평택을 자신이 쓰는 시의 근원, 혹은 시적 정서의 발원지라고 말한다. 이 정도면 거의 절대적인 존재라고 불러 마땅하다. 미군기지가 있는 고향 평택(팽성)이 구체적으로 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어릴 적 집 근처에 소위 ‘양공주’라 불리던 누나가 살았어요. 아버지가 미군부대엘 다니셨는데, 먹고 사는 문제이기도 하고 사실 기지촌 정서가 반미와는 거리가 있어요. 그땐 미국의 역할이라든가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어요. 뭐, 요즘 ‘가스통 노인’들의 시각과 다를 바 없겠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미군들의 갖가지 부당한 행태를 보거나, 또 나름대로 학습을 통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하나씩 깨우치게 되었지요. 분단 문제라든가,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등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사실은 나의 현재와 미래를 망쳐버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최근 중국과 미국의 동북아 패권 경쟁에 우리가 어중간하게 끼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평택 미군기지 확장뿐만 아니라,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이나 사드 미사일 등 미군이나 무기의 재배치 같은 게 말이지요.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 미국과 북한의 관계 등을 넓게 보면 미국과 중국의 싸움이고, 한반도는 대리전의 양상을 띠고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화약고인 셈이지요. 경제력을 등에 업은 중국의 세력 확장도 그렇고.
뭔 놈의 시인이 국제 정세까지 고민하고 있느냐 말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다 치고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갈 날이 많은 우리 아이들의 앞날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무기도입 비리를 보세요. 몇몇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 나라의 미래마저 내다파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잖아요.
이러한 일들에 대한 고민이 제 시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보일 듯 말 듯 합니다만. 작은 풀 한 포기를 귀하고 아름답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심정으로 작고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어린아이들이 어른 눈치 안보고 공부하면서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말입니다. 저희 학교 다닐 땐 육성회비란 게 있었지요. 돈을 준비 못한 아이들은 아침마다 불려나가는 겁니다. 가난이 무슨 죄라고,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시인이라고 꼭 가난할 필요는 없지만, 시인은 가난을 만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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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의 뿌리”

(…) 아버지 굽은 등 곧추세워주고 싶은 나는/그러나 아버지 종아리에 달라붙어/피를 빨아먹는 한 마리 통통한 거머리 (…)
-「거머리」 부분

틈을 노려라/파고들지 않으면 살 길은 없다//아버지는 내게/세상을 파고드는 인파이터가 되라고 주문했다 (…)
-「복서」 부분

(…) 함석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처럼/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미군부대 격납고 지붕에서/땅으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
-「뒤란의 봄」 부분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더 이상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시인의 시에는 눈에 띌 만큼 유독 아버지가 많이 나온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뻔한 말이겠지만, 아버지는 제 뿌리입니다. 제가 부정한다 해도 바뀌지 않는, 제가 나온 뿌리이지요. 그 뿌리에 대한 성찰 없이 온전한 나를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모든 부모님들이 그러하셨겠지만, 제 아버지는 참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그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사셨으니까 말이지요. 막내인 관계로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표정 하나하나가 떠오르곤 하지요.
이 땅에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각오를 필요로 합니다. 제가 아비가 된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지니셨을 각오가 어떤 것이었는지 어렴풋하게 그려지네요.”

스물여덟,
셋째 형의 너무 이른 죽음을 겪으면서 시인의 길로 나서
시인의 형들은 문학을 좋아했다. 문예창작과 전공자도 두 명이나 되었다. 자연스럽게 집 안에 책이 넘쳤다. 유년시절 이 같은 분위기가 분명 시인의 길로 이끄는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정말 시인은 왜 시인이 되려고 했던 것일까.
“5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문학 전공자들이 다수여서 집안 분위기가 책 좀 읽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나 쓰기를 통한 문학적 소양은 자연스레 길러졌던 셈이고요. 형들과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 함께 지낸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릴 적엔 집안 형편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 간 형도 있었으니까요. 내 나이 예닐곱 살 무렵 집안 형편이 갑자기 기울어 내리막길을 달렸지요. 첫 시집에 실린 「검은 장화 속의 날들」이란 시에 그때 이야기를 앞부분에 조금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막내라 부모님과 가장 오래 생활한 편이어서 그런지 부모님 관심도 각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저 역시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기도 하고요. 이러한 정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 교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으니까요.  평택 시내에서 시화전을 열기도 했는데, 뭔가 좀 막연했었지요. 이러한 막연성을 구체화 시켜준 게 셋째 형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형은 문예창작을 전공한 시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스물여덟 살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겁니다. 유고 시집 한 권 남겼지요. 그때 형의 죽음을 겪으면서 아, 내가 시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했습니다.
첫 시집 『종이는 나무의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사적인 정리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 모든 개인사를 짚어보며 어느 날 갑자기 나를 구덩이로 내던져버린 자본의 문제를 건드려보고도 싶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신춘문예 투고를 했었고, 이후 매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서른 살이 되면서 인연이 아니다싶어 몇 년 투고를 안 하다가 때를 놓치면 영영 안 될 것 같아서,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작품을 다시 써 투고를 했고 바로 등단했지요. 그때가 36살 때였고, 등단지는 「작가세계」였습니다.”

“예술에서 더 이상 장르 구분은 의미가 없어”
시인은 2013년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문학세계사)에 이어 2014년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가쎄)는 산문사진집을 잇달아 발표했다. 시인이 시가 아닌, 귀에도 생소한 산문사진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술에서 더 이상 장르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예술의 바탕은 시가 될 거란 확신도 있고요. 시가 바탕이 된 사진집은 더 이상 이상한 책이 아닙니다. 요즘에 주변을 보세요. 휴대폰에 장착된 카메라로 누구나 사진을 찍고 자신을 표현합니다. 문학에 사진이든 그림이든 뭐든 함께 결합해 또 다른 예술작품을 파생시켜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당연히 시도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작가의 책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최대한 여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작품에 대한 영감이 머릿속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먹고 사는 일 때문에 힘들겠지만, 예술적 감정과 정신적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여행에 대한 생각을 하지요. 그러한 결과물이 당연히 사진과 글인데, 어느 하나만 가지고서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과 글을 함께 엮어 책을 만들었던 겁니다.”   

“시는 시 일뿐…
시를 읽고 난 후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게 시의 역할”
누군가 시인을 낡은 어구(漁具)를 들고 바다에 나가는 어부에 비유했다. 첨단을 달리는 시대에 구닥다리 도구인 낚시와 그물을 가지고 드넓은 바다로 나서는 어부…. 예나제나 변하지 않는 물음 하나.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시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를 쓴 적은 없으니까요. 다만, 시를 통해 내 생각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내가 하고픈 말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카프카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며,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쓰는 것과 다르고, 내가 쓰는 것은 내가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다른 것이지요.
시는 시일 뿐이지요. 그 시를 읽고 난 후 어떤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게 시의 역할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반응들의 외연이 좀 더 확장된다면, 시가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는 시일 뿐이지요.”
    
삶에 태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가고파
앞으로 계획을 묻는 말에 시인은 “삶에 태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라고 답했다.
“당장 4월초에 일간지 여행 글 연재 때문에 외국엘 다녀와야 하고, 시집 등 두 권의 책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따로 긴 계획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이면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이면 십 년이 되고 결국 그런 게 모여 일생이 되는 것이니까요.”
시인의 본명은 박홍희다. 후기는 시인 자신이 지은 필명이다.
“뒤 후(後)자에 기운 기(氣)자를 쓰는데, 국어사전에 보면 ‘버텨 나가는 힘’이라고 뜻을 정의하고 있지요. 어차피 내가 하고 싶어 선택한 길이라면, 힘들더라도 끝까지 버텨 나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필명을 ‘버텨 나가는 힘’으로 쓸 만큼 시인이 발을 딛고 서기엔 너무도 각박한 세상. 부디 더 좋은 작품, 더 많이 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시인에게 평택은 고향이고, 각별한 곳인 만큼 마지막까지 평택시민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점점 낯설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만, 제 뿌리가 아직도 그곳에 연결돼 있음을 느낍니다. 평택이 좀 더 활기차고 문화적이며 사람이 우선인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멋진 곳인데, 너무 자본 중심의 소비적인 도시, 군사도시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문화적인 역량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지자체도 지원을 해주고, 시민들도 따뜻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박후기 시인은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 출생.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2006),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창비, 2009), 『격렬비열도』(실천문학사, 2015)를 출간했다. 사진산문집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그림책 『그림 약국』, 건강에세이 『암에 걸린 사람들』 등을 펴냈다. <신동엽문학상> <김만중문학상(시)>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