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뜻 한 작가의 대표작품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모든 작품마다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고, 그것의 구현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으로 발전과 확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작가라면 대표작품 운운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고 커다란 결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대표작품은 아니지만 최영지 작가를 말할 때 생태공간이라는 누에고치 오브제(objet) 작업은 빼놓을 수 없다. 누에고치라는 소재의 강렬함과 주제의식의 선명함 때문이다.
지난 5월 22일 작업실로 쓰고 있는 비전동 화실에서 최영지 작가를 만났다.

살아있는 평택의 야생·생태 화폭에 담아
화실을 찾았을 때 최영지 화가는 다음 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오는 8월, 서울 관훈 갤러리에서 하는 다섯 번째 개인전을 위한 것이다. 이번에도 평택의 산과 강, 거기에 서식하고 있는 생명체를 담아낼 계획이다.
“강을 낀 평택의 산과 들은 생명체가 놀랍도록 많이 서식하고 있어요. 너구리, 오소리, 원앙, 민물가마우지, 도요새, 멧토끼, 살모사…. 살아있는 평택의 야생을 그려내려고 합니다.”
작가는 2007년 10월에 가진 제3회 개인전 ‘확장된 생태공간-아산만부터 내리까지’에서 평택의 자연과 생태공간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삼정리 수로에서-물닭의 비상’, ‘신대동 앞-강가의 오리떼’, ‘신왕리 마두골-뜨락에 핀 백일홍’, ‘신왕리 마두골-감나무 위의 청설모’, ‘삼정리 수로에서-왜가리의 시선’….
모두 수채화로 그린 작품 제목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품에는 물닭, 쇠기러기, 청설모, 오리, 왜가리, 백일홍 등 자연에서 살고 있는 생명으로서의 동·식물이 주인공이다.
최 작가는 아직도 이들 동물을 처음 만났을 때의 떨림과 흥분을 잊지 못한다.
“겨울인데 아산만 끝에서부터 걸어가기로 하고 카메라 하나만 들고 무작정 나섰어요. 안중에서 평택호까지 걸어가고, 거기서 다시 산을 넘고 넘어서 삼정리 심복사 앞까지 왔을 때였어요. 아침에 출발했는데 저녁이 다됐어요. 백조, 큰 기러기, 쇠기러기, 물닭….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어요. 바닥을 기어서 최대한 가까이 갔고, 조심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지요.”
평택의 자연과 생태공간을 담는 작업은 4년 후에 가진 제4회 개인전 ‘평택호에서부터 진위천 안화리와 안성천 군문동 유역까지’로 이어가면서 작품의 폭과 깊이를 더했다.  

   
민중미술로 시작해서 ‘생활’·‘생태’로 전환
최 작가가 처음부터 자연과 생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으로 1980년대 한 복판을 지나온 사람이 대개 그렇듯 작가도 현실참여적인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고 있는 작업과 정 반대였던 것이다.
“80년대 대학생은 독재에 항거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쳤어요. 당연히 작품도 농민, 민중미술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실제 작품도 그랬습니다. 수출에 꼭 필요한 컨테이너를 주제로 우루과이라운드 반대를 주장하는 작품도 했어요.”
민중미술을 하던 최 작가. 그의 작품세계가 갑자기 자연과 생태, 생활로 전환되었다. 어떤 계기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리얼리즘도 결국은 우리의 삶과 직결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적인 현실참여 이전에, 또 그 이면에 먼저 생명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지요. 하나의 생명체가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가, 직업적으로 예술인이지만 나도 생명체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자각이 자연스럽게 ‘생활’로, 자연과 생태공간으로 관심을 이끌었습니다.”

곤충이나 벌레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
자연과 생태공간, 생활에 관심을 가지면서 느꼈던 인식의 가장 큰 변화는 ‘곤충이나 벌레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은 먼저 작품에 꼭 필요한 재료의 변화에서 나타났다.
“기존의 안료(물감)를 사용 않고 자연에서 추출한 것을 쓰기 시작했어요. 녹색을 쓰려면 식물에서 즙을 짜내 섞어 쓰고, 또 황갈색은 점토를 구워 만든 테라코타를 빻고 그 고운 입자를 풀에 섞어서 쓰는 식이었지요.”

진부, 예술의 죽음…새로운 실험의 연속
예술작품은 날것 그대로의 슬로건이나 구호와 구분이 된다. ‘자연의 작은 생명체나 인간이 같다’는 인식에 도달한 최 작가. 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품으로 형상화시키려고 했을까.
예술의 죽음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진부(陳腐)함에 있다. 이는 예술세계에서 새로운 실험이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우선 예술과는 거리가 먼 ‘적외선 전신 체열 촬영’ 기계를 이용했다. 질병 부위의 미세한 체온 변화를 적외선 촬영과 컴퓨터 분석으로 몸에서 발생하는 체열을 감지해내는 기계에 알몸으로 올라섰다.
“옷을 다 벗고 간호사에게 찍어달라고 했어요. 많이 창피했지만 작품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요.”
왜 그랬을까. 적외선 전신 체열 촬영기로 사람을 찍거나 잠자리를 찍었을 때 체열에 따른 색상변화는 큰 차이가 없다. 기계로 봤을 때 사람이나 곤충이나 같다는 것이다. 최 작가는 자신의 체열 사진과 메뚜기를 병치시켜 놓은 작품에 ‘동질적 관계’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컴퓨터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나타내는 픽셀(pixel)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니터로 보는 모든 이미지는 사실 픽셀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사각형의 점들로 구성돼 있는데 이것으로 볼 때 나비(곤충)나 사람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신문에서 아이디어 얻은 누에고치(코쿤·Cocon)
최영지 작가에게 누에고치(코쿤·Cocon) 작업은 작품의 큰 전기가 된다. 소재의 새로움은 물론이고 생태미술가로서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는 신문에서 얻었다.
“1995년인가 그랬어요. 내년 유망 업종으로 ‘도심속 안마·휴게·수면텔 성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어요. 캡슐처럼 생긴 공간에 들어가 쉬는 것인데 누에고치, 하우스, 빌라, 둥지를 모두 ‘코쿤’이라고 하더라고요. 둥지나 고치에서 잠깐 살다 죽는 미물이더라도 시간의 짧고 긴 것에 차이는 있지만 역시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꼈어요.”
코쿤을 극명하게 소재로 등장시켜보자고 한 것이 누에고치 작업의 시작이다. 소재의 참신함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을 회화(그림)로 표현할 것인지, 아니면 물체로 직접 제시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했다.
고민의 답은 직접 자연에서 고치를 찾아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숲으로 가서 이들을 찾아보았으나 송충이도 보기 힘들었다. 농약을 많이 쳐서 다 죽은 것이다. 그러다 누에농장에서 푸대에 가득 담긴 누에 껍질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누에를 유화로 그려
처음에는 누에가 기어가는 것을 유화로 표현했다. 정확히 말하면 붓이 아니라 주사기를 이용했다. 실험성은 여전했다.
“주사기로 빨아들인 물감을 하나하나 쏘면서 꿈틀꿈틀하는 애벌레를 표현했어요. 여기에 물감을 아예 쏟아 붇고 이것이 흘러가는 대로 형상이 만들어지는 우연의 효과를 더했지요. 화면을 보면 수직선과 수평선이 있는데 이것은 씨줄과 날줄이 엮어지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작가는 이제 유화에서 누에고치를 직접적인 소재로 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누에고치 껍질을 까고, 세탁하고, 염색하고, 가공처리하고, 잘라서 다닥다닥 붙이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데 붙이는 시간만 40일씩 걸리고 누에고치 수집부터 가공처리까지 하는 것을 합하면 두 달 정도 걸리는 힘든 작업이에요.”
타원형의 누에고치는 자체로 완결적인 우주이자 생명의 공간이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생태적 공간과 생명을 표현하는데 더없는 소재인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봐야 제 모습 드러내는 점묘화법
누에고치 작업은 무작정 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에고치를 풀어서 이것을 다시 공룡알 만큼 크게 만들거나, 나비나 사람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누에고치가 가지는 크기 때문에 형상화는 점묘화법을 이용했다. 가까이서 보면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누에고치를 직접 소재로 사용한 작품으로는 ‘생태공간-안식처’ 시리즈와 ‘생태공간-잉태’ 등이 있다.
‘생태공간-잉태’는 큰 누에고치로 보이는, 세로로 길쭉한 타원형 안에 임산부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된 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누에고치가 가지는 생명의 공간과 소우주로 새 생명이 자라는 어머니의 배를 병치시켜 주제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누에고치 오브제에서 수채화로
누에고치를 직접적인 소재로 작품을 하던 최 작가가 이 작업을 중단하고 자연으로 뛰어들었다. 수채화로 자연과 생태, 동·식물을 직접 그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또 한 번 큰 변화다. 이유가 뭘까.
“많은 시간을 들여서 누에고치작업을 하는데 나는 정말 자연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생각이 이쪽으로 확장되었어요. 자연의 질서, 자연을 더 많이 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한 끝에 자연으로 나가자, 가서 더 많이 관찰하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작가가 평택의 산과 강에 서식하는 생명체를 전통적인 수채화로 담아내기 시작한 것은 자연을 좀 더 알기 위한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시의 자연 간직한 마한산 마두골·신왕리 덕목산·삼정리 벌판 보존돼야
최영지 작가가 산으로 강으로 뛰어다니며 평택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아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관람객에게 심미적인 아름다움과 안정을 주는데 머물지 않는 것이다.
“내 역할은 그림으로 자연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하는 것을 알리는 거예요. 평택의 강과 산, 들판에 나가 직접 관찰하면서 생명체가 굉장히 많은 것을 확인했지요. 특히 강을 끼고 있는 마한산 마두골, 신왕리 덕목산, 삼정리 벌판은 완벽하게 원시가 보존되어 있어요. 여기는 개발에서 꼭 지켜야 해요.”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약한 자신이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 말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때문이다.

생태미술가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꿈
최영지 작가가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누나의 역할이 컸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내일이 개학인데 저녁 때가 되도록 그림 숙제를 못했어요. 누나가 필통 뚜껑으로 쥐어박으면서 그림을 가르쳐 줬어요. 나무는 이렇게 그리는 거야, 또 집은 저렇게 그리는 거야. 그 때 스케치북 안에 있는 도화지는 다 써서 표지 속에 그림을 그려냈어요. 누나에게 그림 지도를 받은 것이 결국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 셈이 되었어요.”
화가로서 최 작가의 꿈. 그것은 생태미술가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최영지를 평택의 자연과 생태를 연구하고 그림으로 담아낸 화가로 시민이 기억한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앞으로도 생태미술가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꿈이고 소망입니다.”

최영지(崔英智, Choi, Yeong-Ji)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학과 서양화전공, 동 대학원 졸업
현)평택미술협회 회원, 평택예총 시민예술대학 소묘·유화반 강사, 최영지 화실 운영
●개인전: 2011 제4회 최영지 개인전 ‘확장된 외부적 생태공간-평택호에서 진위천 안화리, 안성천 군문동 유역까지’ (단성갤러리-서울, 베아트갤러리-평택)
●부스개인전: 2011 제5회 평택전국누드드로잉 교류전-몸과 자연 (평택호예술관, 평택) 외 다수
●단체전 및 초대전: 2015 최영지 초대개인전 (갤러리 락, 평택)
 2014 2014 중앙 현대 미술제 (한전아트센타, 서울) 외 다수의 단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