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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에게 말걸기, 혹은 고인돌이 들려준 이야기

기사 등록 : 2015-06-09 10:03:00

박명호 samguri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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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탄면 수월암리 고인돌. 경동 나비엔 공장 앞에 옮겨져 있다

 

『나는야 한 여자가 좋다』. 외설 논란에 휩싸였던 마광수의 소설 제목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띄어쓰기 하나로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었다.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재치다.
그에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자리했던 시기는 마광수의 소설이 세간의 관심을 끌던 그 언저리였다. 작품의 본 뜻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와 ‘가벼움’의 고민을 따로따로 안겼던 책.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가벼움’에 화가 났던 것만은 분명했다. 삶이, 그리고 죽음이 그렇게 가벼워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학교 옥상에서, 다리 위에서, 어른과 학생이 몸을 깃털처럼 던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존재의 무거움에 억눌려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은 고인돌의 덮개돌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것이고, 성스러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인돌이 성큼 다가와 말을 들려주기 시작한 것은.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그가 고인돌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은 가벼움이 사회 곳곳에 넘실대던 때였다.

 

삶의 지평이 우주까지 뻗어  
고인돌 덮개에 새겨진 바위구멍을 ‘성혈’이라고 한다. 이것은 장례의식, 하늘에 대한 제천의식과 관련된 문화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아득이 1호 고인돌’의 경우 264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최근에는 고인돌 덮개에 새겨진 성혈이 하늘의 별자리로 추정되는 것이 많아 천문학적으로 조사 연구가 한창이고, 연구 결과 성혈은 별자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돌에 새겨진, 고인돌에 내려온 하늘의 별. 3000여 년 전, 지금 여기 산하를 뛰어다니던 우리의 조상들. 몸과 발은 비록 땅에 있으나 정신과 영혼은, 삶의 지평은 이미 우주적 존재로 확산돼 있었던 것일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사람의 기원은 재야. 인도 신화가 과학과 거의 일치하지. 우주의 별이 폭발할 때 떨어진 재가 지구에 날려 와 지구의 원자들과 결합해 최초의 미생물이 생겨났어. 진화 역시 마찬가지지. 초신성의 폭발은, 늙은 별의 죽음이자 신생별의 탄생이고 그 재는 지구 생명의 조상이었어. 죽은 별의 재가 지구에 유입돼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킬 때마다 생물은 비약적으로 진화해 왔거든 (…) 그 죽은 별의 빛이 우리에겐 영원의 시각으로 반짝이며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는 거야. 이 세상은 정말로 별의 꿈인지도 몰라.”
-전경린,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중에서

 

그는 전경린의 소설을 읽으면서 성혈이 별자리를 새겨놓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인돌의 덮개돌에 자신의 근원을, 죽어서 다시 돌아갈 별을 새겨놓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주를 잊고 사는 왜소한 현대인


 

“우리 민족은 북두칠성 신선의 점지를 받아 태어나고 ‘칠성판’에 누워 이승을 떠난다. 개천절 행사에 참여하는 강화도의 칠선녀 역시 북두칠성의 분신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북두칠성의 민족’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우리다.”
박석재, 『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 중에서

 

우리는 원래 하늘의 자손이다!’
고인돌에게 말을 걸고, 고인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그에게 박석재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정말 박석재 말대로 우리가 하늘의 자손이라면 자신의 무덤에, 또 고인돌 덮개에, 그리고 이 땅에 별을 그리고 새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가 다시 전경린의 소설을 떠올렸다.

 

“고흐!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 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 Desiderare. 이 라틴어는 별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한다는 뜻이야. 놀랍지? 욕망의 원래 뜻은 사라진 별에 대한 향수이며 그리움이야. 사라진 별, 그건 별이 인간의 조상이고 고향이라는 의식의 근원이 욕망이라는 말속에 있는 거야. 모든 욕망은 향수인 거지. 우리는 전혀 모르는 것을 욕망할 수는 없어.”
전경린,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중에서

 

박석재와 전경린의 글에서 고인돌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모든 것은 이제 고인돌과 성혈로 수렴된다. 별, 죽어서 갈 수 있는 곳.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
3000여 년 전, 청동기시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미개한 사회다. 스마트폰이 없었고, 자동차와 비행기가 없었고….
분명히 맞다. 고인돌을 만들던 청동기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미개한 사회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문명사회를 사는 우리는 그때 보다 행복한가. 오히려 반대로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던, 공동체가 살아있던 그때 보다, 또 자신을 우주적 존재로, 존재의 확산을 이야기하던 때보다 더 불행해진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언제부터 하늘을 멀리하며 눈과 머리를 땅에 고정시켰을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한없이 왜소한 존재로 만들었을까….   

 

죽음, 삶을 말하다
고인돌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많았다. 고인돌이 무덤, 제단, 묘역을 상징하는 묘표석으로 기능했음을 고려할 때 ‘죽음’은 빼놓을 수 없었다.
그가 평택의 고인돌을 보면서 먼저 떠올린 것도 죽음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삶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지금 유행처럼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죽음체험, ‘힐-다잉’ 프로그램이 죽음이 아닌, 삶을 말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정사진을 찍고, 유서를 남기고,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가 눕고…. 관에 누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한 없이 긴 줄만 알았던 삶이 순식간에 지나고 이제 바로 죽음을 맞이한 시간. 가족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인연이 끝나고 영영 이별하는 시간. 어둠 속에서 삶의 회한과 후회를 절감한 사람의 인생은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수천 년, 시간을 가로질러 그의 앞에 자리한 고인돌. 미개했던 시대라고 여기는, 청동기 시대에 살았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지금까지 헝클어졌던 그는 머릿속이 간단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장 먼저 탐심과 욕심이 빠져나가고, 그것의 무게만큼 몸이 가벼워지고….
그가 말했다.
“고인돌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 보세요. 3000년도 더 된 ‘오래된 미래’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분명히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갈라지는, 쩍 하는 큰 소리도 들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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